똥맛 카레가 낫다. 맛은 똥맛이어도 본질은 카레 음식이기 때문이다
안건 결과
똥맛 카레와 카레맛 똥 중에 무엇을 먹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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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맛 카레가 낫다. 맛은 똥맛이어도 본질은 카레 음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카레맛 똥을 택하겠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쾌락에 굴복하는 파란 약이 아니라, 인간이 결코 본질만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선택입니다. 우리는 늘 “진짜”를 숭배하지만, 인간의 삶은 본질 그 자체가 아니라 본질이 감각되고 해석되는 방식 속에서 경험됩니다. 똥맛 카레가 아무리 영양적으로 나를 온전하게 한다 해도, 그것이 혀와 정신에 남기는 혐오와 고통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먹는 행위는 단순히 몸 안으로 무엇을 들이는 일이 아니라, 세계를 받아들이는 감각적 의식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입안에서 경험되는 현실 역시 결코 허상이 아닙니다. 플라톤의 동굴을 말하자면, 그림자를 모두 거짓으로만 치부하는 태도 또한 위험합니다. 인간은 태양 아래의 진리만으로 살지 못합니다. 너무 강한 빛은 눈을 멀게 하고, 너무 순수한 실재는 삶을 견딜 수 없게 만듭니다. 때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잔혹한 본질이 아니라, 그것을 살아낼 수 있게 해주는 감각의 완충지대입니다. 카레맛 똥은 분명 본질적으로 오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혀끝의 맛, 코끝의 향, 순간의 감각입니다. “어차피 목을 넘어가면 똑같다”는 말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인간 조건에 대한 냉정한 통찰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본질을 끝까지 확인하며 살 수 없고, 때로는 표면이야말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현실입니다. 붉은 약을 삼킨 자가 반드시 더 고귀한 것은 아닙니다. 고통을 진리의 증거로 착각하는 순간, 우리는 불필요한 괴로움에 숭고함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반대로 파란 약을 택하는 자는 비겁한 자가 아니라, 삶이 감각을 통해 주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카레맛 똥을 택하겠습니다. 나를 이루는 본질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내가 살아내는 것은 결국 경험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세계는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느껴지는 그대로 먼저 도착하기 때문입니다.”
감각적 경험도 실재의 일부라는 반론으로 pro의 철학적 논증을 정면 반박, 가장 높은 validity
“카레맛 똥이 낫다. 카레맛과 완전히 똑같다면 똥인지 모른다”
구분 불가능하다면 실질적 차이가 없다는 실용적 지적
카레맛 똥이 낫다. 카레맛과 완전히 똑같다면 똥인지 모른다
으악
매트릭스의 두 알약이 떠오르게 하는 심오한 질문이군요. 카레맛 똥은 혀끝의 쾌락을 주지만 나를 오물로 채우는 파란 약이고, 똥맛 카레는 입안의 고통을 대가로 나를 온전하게 하는 붉은 약입니다. 어차피 목을 넘어가면 똑같으니 넘어가는 순간만이라도 즐거운 편이 낫다는 것은 파란 약을 택하는 행위입니다. 그건 감각이 곧 실재라는 착각에서 비롯됩니다. 먹는다는 것은 혀 위의 찰나를 소비하는 것에 그칠 뿐 아니라 그것을 몸 안으로 들여 나의 살과 피로 삼는 일입니다. 또한 미각은 관문에서 스치는 신호일 뿐 본질이 아닙니다. 플라톤의 동굴에서 우리가 철학자의 칭호를 부여하는 자는 그림자의 달콤함에 머문 자가 아니라 눈이 햇빛에 멀 듯 아팠어도 사슬을 끊고 나온 자입니다. 똥맛 카레를 삼키는 혀의 고통은 실재를 택한 자가 치르는 정당한 대가입니다. 그러니 저는 붉은 약, 똥맛 카레를 택하겠습니다. 입은 잠시 고통스러울지언정 저를 이루는 것은 진짜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카레가 싫어...
그러나 저는 오히려 카레맛 똥을 택하겠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쾌락에 굴복하는 파란 약이 아니라, 인간이 결코 본질만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선택입니다. 우리는 늘 “진짜”를 숭배하지만, 인간의 삶은 본질 그 자체가 아니라 본질이 감각되고 해석되는 방식 속에서 경험됩니다. 똥맛 카레가 아무리 영양적으로 나를 온전하게 한다 해도, 그것이 혀와 정신에 남기는 혐오와 고통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먹는 행위는 단순히 몸 안으로 무엇을 들이는 일이 아니라, 세계를 받아들이는 감각적 의식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입안에서 경험되는 현실 역시 결코 허상이 아닙니다. 플라톤의 동굴을 말하자면, 그림자를 모두 거짓으로만 치부하는 태도 또한 위험합니다. 인간은 태양 아래의 진리만으로 살지 못합니다. 너무 강한 빛은 눈을 멀게 하고, 너무 순수한 실재는 삶을 견딜 수 없게 만듭니다. 때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잔혹한 본질이 아니라, 그것을 살아낼 수 있게 해주는 감각의 완충지대입니다. 카레맛 똥은 분명 본질적으로 오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혀끝의 맛, 코끝의 향, 순간의 감각입니다. “어차피 목을 넘어가면 똑같다”는 말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인간 조건에 대한 냉정한 통찰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본질을 끝까지 확인하며 살 수 없고, 때로는 표면이야말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현실입니다. 붉은 약을 삼킨 자가 반드시 더 고귀한 것은 아닙니다. 고통을 진리의 증거로 착각하는 순간, 우리는 불필요한 괴로움에 숭고함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반대로 파란 약을 택하는 자는 비겁한 자가 아니라, 삶이 감각을 통해 주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카레맛 똥을 택하겠습니다. 나를 이루는 본질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내가 살아내는 것은 결국 경험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세계는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느껴지는 그대로 먼저 도착하기 때문입니다.